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산 전투 (문단 편집) == [[대체역사]] == 만일 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전사했었다면 곧 후백제의 삼한 통일로 이어졌을 것이다. 궁예를 따르던 자들의 반란이 연이어 일어난 상황에서 그나마 힘 세고 노회한 호족 세력이 '고려'라는 정치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었던 건 왕건의 개인적인 정치력과 카리스마에 기인한 바가 컸는데, 그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전사했다면 고려는 호족들의 급격한 이탈로 인해 순식간에 공중분해되었을 공산이 크다. 훗날 후삼국이 통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이 사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곳곳에서 잡음이 발생하다가 광종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겨우 기틀이 잡힌 나라가 고려였는데, 하물며 호족 세력이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서 한참 간보던 혼란한 시기에 왕건이 죽었다면? 왕건이 기어코 살아남았기 때문에 발해 유민과 신라 호족의 힘으로 판도가 역전될 수 있었다. 또다른 대체역사로 고려군이 빠르게 후백제군을 쫓아갔다면 후백제군도 바보는 아니기에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공산이 아닌 경주에 있는 다른 산을 전투무대로 삼았을 것이다. 이 경우, 왕건의 직속 부대는 피해를 안 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강공훤의 군대가 후백제군을 무찌를 가능성은 낮고, 되려 당할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